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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 이광훈칼럼-어느 명퇴지점장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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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향신문 작성일03-07-30 12:43 조회17,6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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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IMF 외환위기때 명예퇴직한 전직 은행 지점장이 5년동안의 쓸쓸했던 신산(辛酸)의 세월을 마감했다. 경찰이 추정한 사인은 알코올 중독에 의한 합병증. 1998년에 명예퇴직한 그는 지난 5년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소주 5병, 많을 때는 10병씩 마실 정도로 술에 젖어 살았다고 한다.

그가 지난 5년동안 살아온 세월은 IMF 외환위기때 직장을 물러난 대부분의 퇴직자들이 겪었던 괴롭고 쓸쓸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 하나의 유형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은 숙환으로 숨진 어느 중년 퇴직자의 평범한 사망사건으로 지나가고 말았다.


고인은 퇴직 이후 깊은 실의에 빠져 친구도 만나지 않았으며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은 채 집안에서 칩거했다고 한다. 약사인 부인은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약국에 취직해 나가고 아들은 군에 입대한 데다 딸은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텅빈 집안에서 오로지 술을 벗삼아 하루하루를 보냈다는 것이다.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자부심에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바닥에서부터 퇴직 후의 삶을 새로 설계하겠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명퇴 지점장의 좌절은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중년의 전환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한 하나의 사례이다. 사람에 따라 퇴직 이후의 삶을 새롭게 설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퇴직을 곧 인생이 끝난 것으로 받아들여 실의의 세월을 보내는 이도 있다. 중년을 맞은 남자들의 삶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어느 사회학자는 전환기적 상황에 적응하는 유형을 4가지로 분류한 적이 있다.


첫째는 반영웅형으로 극심한 지위변동을 경험한 중류 또는 중상류층에서 나타나는 유형이다. 대인관계가 거의 없으며 자기중심적이고 고립감이 높다고 한다. 자녀에 대한 간섭이나 통제도 거의 없으며 아내의 취업에 대해서도 융통성을 보이지만 자아 정체감이 해결되지 않아 혼돈과 실망에 빠져 있는 유형이다.


두번째는 활력형으로 중년기를 성취와 완성의 시기로 파악하며 과거와 현재에 만족하는 유형이다. 인간관계도 원만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도 잘 받아들이는 유형으로 중년의 전환기에 가장 잘 적응하는 타입이다. 세번째는 불만형으로 중하류층에 많이 나타나며 자아 통합이 안되어 있어 매우 권위적이고 가족과의 갈등이 심할 뿐 아니라 대인관계에 적대감이 크고 쉽게 자기혐오에 빠져드는 유형이다.


마지막 유형은 밖으로 드러나는 겉과 속이 다른 가장(假裝)형이다. 겉으로는 자신의 처지가 매우 만족스러운 듯이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실망감과 초조감에 시달리는 유형이다.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형식이나 절차를 따질 뿐 아니라 대인관계도 딱딱하다. 대체로 알코올 중독이나 우울증 환자가 되기 쉽다. 때로는 광신적 신앙에 빠져들기도 한다.


중년기에 처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말로는 퇴직 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이 퇴직을 맞는 경우가 많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는 낙천적인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빠서 그런지는 몰라도 퇴직 이후를 제대로 대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국민연금제도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연금이 퇴직 후의 생활을 보장하기엔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업마다 직장마다 재교육이니 뭐니 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실시되고 있지만 그러나 퇴직 후를 대배하는 프로그램은 그리 많지 않다. 인재를 그저 1회용 종이컵처럼 한번 쓰고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한번 사원이면 영원한 사원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릴 때가 되었다.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유행어가 설득력을 얻는 시대일수록 퇴직한 사람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관심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명퇴한 어느 은행 지점장의 죽음은 모든 중년들에게 던지는 준엄한 경고장이기도 하다.


〈이광훈 본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