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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반고흐, 상처받은 영혼의 ‘사망진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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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향신문 작성일03-10-13 12:02 조회18,780회 댓글0건본문
◇반고흐, 죽음의 비밀
문국진/예담
1890년 7월27일 일요일, 프랑스 작은 마을인 오베르의 밀밭에서 총성이 울렸다. 고흐가 비틀거리며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고흐의 배에는 구멍이 난, 그래서 실오라기 같은 피가 흐르는 상처가 있었다. “내가 쏘았어요”
고흐의 절친한 친구이자 의사인 가셰 박사가 달려왔다. 총알은 고흐의 복부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 가셰 박사가 돌아갔다. 이틀 뒤 고흐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누가 이 배를 갈라주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한 뒤 숨을 거두었다. 자살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110년이 지난 지금에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의문의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에 대한 갖가지 추리가 만발하고 있다.
이 ‘고흐 권총자살사건’을 우리나라 대표적인 법의학자인 문국진 교수가 ‘고흐사망사건’을 흥미진진한 법의학 논리로 추적했다. 그는 고흐의 작품과 편지에서 배어나오는 죽음의 비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철저히 분석하여 ‘사망진단서’를 작성한다. 검안의사 문국진의 도장이 찍힌 사망진단서는 이렇다. ‘빈센트 반 고흐, 총기 발사에 의한 자살’. 검안의사가 내린 직접사인은 ‘급성범발성복막염(急性汎發性腹膜炎).
◇고흐는 고갱이 죽였다?=‘완전범죄를 노린’ 고갱에 의한 타살설은 일견 그럴 듯하다. 고갱이 자신과의 갈등 때문에 귀를 잘랐던 고흐의 심리를 이용했다는 것. 타살설을 들여다 보자. 고갱은 제자에게 “몰래 고흐집에 가서 권총과 펜싱용 장갑을 두고오라”고 사주한다. 고갱은 한때 전도사였던 고흐가 일요일마다 극심한 정서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간파했다. 귀를 자른 것도 일요일. 고갱은 정서불안에 빠진 고흐가 자기 곁에 권총이 있으면 반드시 방아쇠를 당길 것이라고 여겨 음모를 꾸몄다는 게 타살론의 요체였다. 그러나 문교수는 고개를 내젓는다.
◇위장발사였나?=고흐는 귀를 자를 때도 귓불부분만 잘랐다. 이번에도 그는 심장과 머리가 아니라 복부에, 그것도 너무나 낡은 권총으로 관통도 되지 않을 정도로 쏘았다. 왜일까. 정말 죽으려 한 게 아니라 고갱이 문병올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쏜 것인가. 하지만 자신을 평생 돌봐주었던 동생 테오에게 죽음을 각오하며 쓴 편지는 유서나 마찬가지이다. 총창을 입은 뒤 30시간 동안이나 살아있었던 것은 조악한 총기에 의한 발사여서 총알이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 복강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고흐의 자살은 ‘자살학의 교본’=고흐의 죽음은 자살의 전형적인 인자를 모두 갖추었다. 죽은 형에게 빼앗긴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상처를 입었고, 4명의 여인에게 줄줄이 퇴짜를 맞는다. ‘화가공동체’를 꿈꿨으나 고갱에게 배신당해 귀를 잘랐다. 자살미수자는 언제든 다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동생 테오마저 가정을 이뤄 형을 소홀하게 대하자 엄청난 충격을 느꼈을 터였다. 아마도 4번의 실연경험은 자살의 가장 심각한 위험인자였을 것. 만약 사랑하는 여자가 곁에 있었다면 그는 결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흐를 죽음으로 몰고간 요인 중 하나가 ‘압생트’라는 독주(알코올 도수 70~80%)였다. 압생트를 즐긴 고흐는 말년 18년간 최소 환각을 동반한 발작을 네번이나 일으켰다. 그의 가계도 만만치 않다. 할아버지와 두 숙부, 이모, 누이동생, 막내동생 등 모두가 정신장애를 갖고 있었다.
◇구속감인 폴 가셰=여기서 법의학자로서 용서할 수 없는 자가 고흐의 친구라는 가셰다. 미술사에서는 가셰가 신이 내린 반 고흐의 위로자로 표현되지만 천만의 말씀. 가셰는 고흐가 죽자마자 30점의 그림을 차지했으며 더욱 용서못할 일은 가셰가 뱃속에 총알이 있는 환자를 내버려두고 갔다. 당시 고흐의 상태로 보면 가까운 병원에 가서 수술했다면 충분히 회복했을 터였다.
〈이기환기자〉
문국진/예담
1890년 7월27일 일요일, 프랑스 작은 마을인 오베르의 밀밭에서 총성이 울렸다. 고흐가 비틀거리며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고흐의 배에는 구멍이 난, 그래서 실오라기 같은 피가 흐르는 상처가 있었다. “내가 쏘았어요”
고흐의 절친한 친구이자 의사인 가셰 박사가 달려왔다. 총알은 고흐의 복부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 가셰 박사가 돌아갔다. 이틀 뒤 고흐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누가 이 배를 갈라주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한 뒤 숨을 거두었다. 자살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110년이 지난 지금에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의문의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에 대한 갖가지 추리가 만발하고 있다.
이 ‘고흐 권총자살사건’을 우리나라 대표적인 법의학자인 문국진 교수가 ‘고흐사망사건’을 흥미진진한 법의학 논리로 추적했다. 그는 고흐의 작품과 편지에서 배어나오는 죽음의 비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철저히 분석하여 ‘사망진단서’를 작성한다. 검안의사 문국진의 도장이 찍힌 사망진단서는 이렇다. ‘빈센트 반 고흐, 총기 발사에 의한 자살’. 검안의사가 내린 직접사인은 ‘급성범발성복막염(急性汎發性腹膜炎).
◇고흐는 고갱이 죽였다?=‘완전범죄를 노린’ 고갱에 의한 타살설은 일견 그럴 듯하다. 고갱이 자신과의 갈등 때문에 귀를 잘랐던 고흐의 심리를 이용했다는 것. 타살설을 들여다 보자. 고갱은 제자에게 “몰래 고흐집에 가서 권총과 펜싱용 장갑을 두고오라”고 사주한다. 고갱은 한때 전도사였던 고흐가 일요일마다 극심한 정서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간파했다. 귀를 자른 것도 일요일. 고갱은 정서불안에 빠진 고흐가 자기 곁에 권총이 있으면 반드시 방아쇠를 당길 것이라고 여겨 음모를 꾸몄다는 게 타살론의 요체였다. 그러나 문교수는 고개를 내젓는다.
◇위장발사였나?=고흐는 귀를 자를 때도 귓불부분만 잘랐다. 이번에도 그는 심장과 머리가 아니라 복부에, 그것도 너무나 낡은 권총으로 관통도 되지 않을 정도로 쏘았다. 왜일까. 정말 죽으려 한 게 아니라 고갱이 문병올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쏜 것인가. 하지만 자신을 평생 돌봐주었던 동생 테오에게 죽음을 각오하며 쓴 편지는 유서나 마찬가지이다. 총창을 입은 뒤 30시간 동안이나 살아있었던 것은 조악한 총기에 의한 발사여서 총알이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 복강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고흐의 자살은 ‘자살학의 교본’=고흐의 죽음은 자살의 전형적인 인자를 모두 갖추었다. 죽은 형에게 빼앗긴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상처를 입었고, 4명의 여인에게 줄줄이 퇴짜를 맞는다. ‘화가공동체’를 꿈꿨으나 고갱에게 배신당해 귀를 잘랐다. 자살미수자는 언제든 다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동생 테오마저 가정을 이뤄 형을 소홀하게 대하자 엄청난 충격을 느꼈을 터였다. 아마도 4번의 실연경험은 자살의 가장 심각한 위험인자였을 것. 만약 사랑하는 여자가 곁에 있었다면 그는 결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흐를 죽음으로 몰고간 요인 중 하나가 ‘압생트’라는 독주(알코올 도수 70~80%)였다. 압생트를 즐긴 고흐는 말년 18년간 최소 환각을 동반한 발작을 네번이나 일으켰다. 그의 가계도 만만치 않다. 할아버지와 두 숙부, 이모, 누이동생, 막내동생 등 모두가 정신장애를 갖고 있었다.
◇구속감인 폴 가셰=여기서 법의학자로서 용서할 수 없는 자가 고흐의 친구라는 가셰다. 미술사에서는 가셰가 신이 내린 반 고흐의 위로자로 표현되지만 천만의 말씀. 가셰는 고흐가 죽자마자 30점의 그림을 차지했으며 더욱 용서못할 일은 가셰가 뱃속에 총알이 있는 환자를 내버려두고 갔다. 당시 고흐의 상태로 보면 가까운 병원에 가서 수술했다면 충분히 회복했을 터였다.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