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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커버스토리-선배는 '키스' 후배는 '원샷'…'캠퍼스 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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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아일보 작성일03-05-07 18:16 조회14,872회 댓글0건본문
‘서울대 투자연구회’ 학생들이 10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고깃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왼쪽부터 김태헌 오승환 김민국 박종원 이상우 채보연.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호연지기의 상징? 아니면 서로의 우정을 돈독히 맺어주는 필요한 수단?
대부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난생 처음으로 합법적인 술자리를 갖는다.
지난해까지 3월 무렵이면 “모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들의 강권을 못 이겨 과음한 신입생이 결국 숨졌다”는 소식이 종종 신문에 실렸다. 기성세대의 반응은 이중적이다. 대부분 “그 녀석들 정말 정신 없는 녀석들이네”라며 비판한다. 그러나 막상 젊은이들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그들이 술 안 마신다고 빼면 “요즘 젊은 것들은 술도 한 잔 안 하나”라며 강권한다.
한국은 세계 제일의 위스키 수입국. 성인 1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이 소주 160병(2홉들이 기준)에 이른다. ‘거부할 것은 거부할 줄 안다’는 신세대 대학생. 그들은 과연 어떻게 술을 마시고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서울대 동아리 선후배들의 술자리에서 ‘신세대 대학생의 술 문화’를 엿봤다.
●1차 고기집
10일 오후 7시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명 ‘녹두거리’. 이곳은 서울대 학생들이 술 마시기 위해 가장 자주 모이는 골목. 서울대 주식투자 연구 동아리인 ‘서울대 투자연구회’ 소속 대학생 7명이 모였다. 동아리 공부 모임을 마친 뒤 가진 뒤풀이 자리.
“뭐 먹을까요?”라고 묻자 이들은 “오늘은 동아일보 기자님이 사주시는 거니까 고기 먹어야죠”라며 돈 낼 사람을 미리 결정해 버렸다. 허름한 고기집으로 들어갔다. “평소에도 이런 데(고기집)서 술을 마시느냐”라고 묻자 “돈 있으면 이리로 와요” “여기서 마시면 최고죠”라며 즐거운 표정들.
앉자마자 이들은 목살과 삼겹살을 시켰다. “술은 평소 먹던 걸로 시키죠, 뭐. 여기 ‘오십세주’ 주세요.”
쾌활한 성격의 태헌이 소주와 백세주를 큰 유리병에 능숙히 섞은 뒤 모두에게 따랐다. 따르는 순서는 철저히 선배부터.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첫 잔이지만 ‘원샷’을 하는 이는 없었다.
“누가 술 제일 잘 해요?”라고 묻자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여학생(황수영)에게 꽂혔다. “말해, 황수영” “그 이야기를 해 드려”라며 난리.
“옛날에 후배들이랑 술 마실 때요, 제가 후배들한테 술을 전혀 안 권해서 인기를 끌었어요.”(수영)
“왜 안 권했는데요?”(기자)
“남한테 술 주는 게 아까워서요. 내가 먹을 술도 모자라 보여서….”(수영)
와 하는 웃음이 터졌다. 술을 거의 못 하는 최고참 민국에게 수영이 사이다를 따라줬다. 민국은 “너 지금 이러는 것도 나한테 사이다를 많이 마시게 해서 술을 아끼려는 음모지”라고 놀렸다.
술은 항상 ‘윗사람’에게 먼저 따랐다. “늘 그렇게 순서를 지키느냐”고 묻자 “술 안 취했을 때는요” “술 취하면 위아래가 어디 있어?”라고 받았다.
자리가 시작된 지 10분 만에 갑자기 한 여학생(채보연)이 공깃밥을 시킨다. “벌써 밥을 시키나?”라는 기자의 질문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
“원래 밥하고 고기하고 같이 먹는 건데….”
“그럼 밥은 언제 시켜요?”
“고기 다 먹고 나중에 식사 시키는 거 아닌가요?”(기자)
“어른들은 그렇게 먹어요? 신기하다.”
“하긴 밥이 나와도 그거부터 먹으면 배부르니까.”
“원래 고기 먹을 땐 말도 잘 안 하잖아.”
잔을 돌리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어른 흉내내느라 잔을 돌리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게 이들의 설명.
공대 컴퓨터공학부 4학년(00학번)인 종원이 고기를 맛있게 오물거리다가 “역시 동아리는 공대랑 분위기가 달라. 공대에서는 고기 안주에 술 먹는 게 1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뭐 하고 먹어요?”(기자)
“찌개죠 뭐. 소주랑 찌개. 그게 제일 싸거든요.”
같은 공대생인 상우가 거들었다.
“나 신입생 때 환영회 해준다고 선배들이 불렀어. 한 15명이 앉아있는데 테이블에 잔을 쭉 놓고 소주만 따르는 거야. 내가 ‘선배, 안주 하나 먹어요’ 했더니 찌개를 달랑 하나 시키더라. 그것도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안 돼. 숟가락 끝에 국물을 찍어서 먹어야 되는 거야. 우와, 정이 딱 떨어지더라. 내가 돈 내서 찌개 하나 시키고 싶더라.”
“우린 그래도 환영회 때 안주 먹었는데”(보연)
“뭐 먹었는데?”
“기본 안주.”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기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상우는 기자에게 술을 줄 때는 무릎을 꿇고 공손히 따랐다. 소주와 전통주 한 병씩 섞은 오십세주가 두 병째 나왔다.
“상우 형, 술 진짜 잘해.”
“아냐, 나 술 못해. 난 심지어 술 마시는 게 싫어.”(상우)
“주량이 얼마나 돼요?”(기자)
“소주 두 잔이요.”(상우)
“에이, 내가 본 것만 해도 두 병인데.”(종원)
“아냐, 나 진짜 억지로 마시는 거라니까. 나 진짜 화장실 가서 토하고 마시고, 토하고 또 마시고 그러는 거야.”
왜 그렇게 억지로 마시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배들이 안 마시면 싫어해요. 남자가 술도 못 마시느냐고 야단쳐요. 따돌림당하기 싫으니까 마시죠.”
“아직도 그렇게 시비하는 선배들이 있나?”(기자)
종원이 거들었다. “많아요. 공대 선배들은 진짜 술 잘 마셔. 한 번은 ‘원샷 릴레이’(소주를 한 사람이 원샷 하면 옆 사람이 즉시 원샷을 해야 하는 방식)를 하는데 도저히 속도를 못 따라가겠더라.”
“진짜 나쁜 선배들은 ‘우리는 키스(잔에 입만 대는 것), 후배들은 원샷’ 이런 걸 시킨다니까.”(상우)
민국이 “우리 동아리는 원래 소맥(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것)하는 분위긴데”라고 말했다. 동아리 회장인 보연이 “우리가 언제?”라고 묻자 태헌은 “내가 비밀을 털어놓지”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번 맥줏집에서 술 마셨을 때 내가 미리 가 있었잖아. 장난 좀 쳤지. 주방장 아저씨한테 부탁한 거야. 우리가 나중에 ‘맥주 3000cc 주세요’라고 시키면 맥주 2000cc에다 소주 한 병을 섞어 달라고. 내가 나중에 술 시킬 때 ‘아저씨, 맥주 3000cc 주시는데요 아까 제가 말한 2 대 1 말고요, 1 대 1로 주세요’라고 했잖아. 그건 소주하고 맥주를 반씩 타 달라는 거였어.”
“그럼 그때 우리가 마신 게 소맥이었어?”(보연)
“그것도 몰랐냐?”(태헌)
“나야 술맛을 모르니까.”(보연)
신입생인 승환이는 “1 대 1은 좀 심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2시간여. 이들은 “2차 갈까요?”라며 즐거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선약이 있다는 보연이를 빼고 모두 2차로 자리를 옮겼다.
●2차 노래방, 3차 맥줏집
오후 9시반경 근처 노래방에서 2차가 시작됐다. 앉자마자 순서에 따라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를 하지 않는 수영. “수영아, 노래해”라는 친구들의 제안에 수영은 “알코올이 부족해”라며 고개를 저었다. “술을 더 시키자”는 기자의 제안에 한 학생이 “나가서 사오면 된다”며 일어섰다.
“술을 사 올 수 있나요? 주류 반입 금지라고 돼있던데….”(기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야, 가방 좀 비워. 그거 말고 좀 큰 걸로.”
가방에다 술을 몰래 담아오려는 속셈이었다.
기자가 노래를 고른 뒤 음을 맞추기 위해 노래 음정을 두 단계 낮추자 “우∼” 하는 야유가 쏟아졌다.
“요즘은 음정 낮춰 부르면 안돼요” “노래방 매너가 그게 아니죠” “불문율을 모르시네.”
30분쯤 지나 태헌의 여자친구가 노래방을 찾았다. 여자친구는 태헌의 팔짱을 끼고 앉았다.
“반가워요, 누나” “우왕, 누나 예뻐요.”(후배들)
“예뻐? 얘는 아마 그런 소리 처음 들을 걸?”(태헌)
상우와 종원이 이적과 김동률 듀오의 ‘거위의 꿈’을 완벽한 화음으로 재현했다. 알코올이 모자라 노래를 안 하겠다고 버티던 수영도 결국 무대로 나섰다.
예약한 한 시간이 다 되자 최고참 민국이 데스크로 뛰어가 “(시간을) 더 넣어주실 거죠?”라며 종업원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어 30분이 넘는 ‘서비스 시간’을 받아왔다.
오후 11시경 종원이가 “3차 안 가요?”라고 물었다. 여자친구와 먼저 자리를 뜬 태헌과 집에 가야 한다는 상우를 뺀 5명이 근처 맥줏집을 찾았다. 밀러 등 외제 맥주 여섯 병이 들어왔다. 3차가 시작되자마자 이들은 종원에게 “마술을 보여줘, 보여줘”라고 외쳤다. 종원은 가방에서 카드 한 벌을 꺼냈다. 카드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고, 남이 고른 카드를 기막히게 골라내는 현란한 마술쇼가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왜 술을 마시느냐”고 이들에게 물었다.
“우린 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냥 좋잖아요. 다들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취하려고는 잘 안 마시지만 그래도 술자리는 즐거워요.”
누구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고 술을 강권하는 이도 없었다. 술자리는 오전 1시를 넘어서 끝났다.
서울대 동아리 '투자연구회' 소속 참석자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知酒知己(술을 알고 나를 알자)▼
술을 마시는 데에도 도(道)가 있다. 소위 말하는 주도(酒道)가 그것이다. 주도란 술을 바르게 마시는 도리이며 예의범절이다. 혹한기의 추위나 농번기의 힘든 일 등과 같은 고난극복을 위해 마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술은 배부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취흥이 주는 맛과 멋, 그리고 활력 때문에 마시는 것이기에 격식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수준인 소학(小學)에서부터 술을 마시는 예법을 배웠다. 술잔은 어른에게 먼저 올리고 어른이 술잔을 주시면 반드시 두 손으로 받는다. 감히 제자리에 앉은 채로 술을 받을 수 없으며 어른이 이를 만류하면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와 마신다. 그리고 어른이 술잔을 다 비우지 않았으면 젊은이는 감히 마시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어른 앞에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므로 돌아앉거나 상체를 뒤로 돌려 마셨다. 술을 따를 때도 도포의 도련이 음식물에 닿지 않도록 왼손으로 옷을 쥐고 오른손으로 따르는 것이 예법이었다. 이런 예법은 소매가 좁은 양복을 입고 사는 오늘날에도 왼손을 오른팔 아래에 대고 술을 따르는 풍습으로 남아 있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 땅, 조상의 신령에게 제사할 때에는 술을 바쳤지만 도깨비나 마귀에게는 결코 술을 준 일이 없다. 20세가 돼 관례(冠禮)를 한 성인에게만 술을 권했고 미성년자는 절대로 술을 먹지 못하게 했다. 미숙한 상태인 미성년자와 지각이 흐린 정신박약자에게 술을 주는 것은 아주 부도덕한 행위로 규정해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이런 음주 전통이 곧 술을 대단히 고귀한 음식으로 승격시켰다.
또 술은 작게는 개인의 인격을 나타내고 크게는 나라의 정치와 법을 알 수 있는 매개체였다. 조선 후기 사람인 이덕무는 그의 저서 ‘사소절’에서 “훌륭한 사람은 술이 취하면 착한 마음을 드러내고, 조급한 사람은 술이 취하면 사나운 기운을 나타낸다”라고 적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술이 사람을 안다’고도 얘기를 한다. 장인이 사위 될 사람을 불러 대작해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한 쉬운 방법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조상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술 문화의 자취를 잃어버렸다. 가장 큰 문제점은 주량에 관계없이 술을 강제로 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권의 극치가 바로 예외 없이 마셔야 하는 폭탄주다. 이제는 ‘더 빨리 더 쉽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비약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전투적 음주문화’로 특징지어질 우리의 음주문화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이색적인 현상을 파생시키고 있다. 술 깨는 약을 미리 사들고 술을 마시러 가는가 하면 해마다 대학신입생들이 사발주로 아까운 청춘을 잃어버리고 있다. 더욱이 술로 타는 속을 술로 푼다는 비상식적인 해장술 개념이 통용되고 있으며 주사(酒邪)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풍토가 있다.
한국은 주정왕국이다. 술 마시고 저지른 실수나 실언이나 횡포나 가해는 웬만하면 면책된다. 그래서 부도덕한 행위나 비일상적인 횡포나, 반체제적인 언행을 하기 위해 일부러 술을 마시기도 한다. 술 마시고 하는 실수는 사람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술이 저지른 실수다.
스스로 술을 사랑해 주당을 자처했던 조지훈(趙芝薰)은 그의 저서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은 높아지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술을 마신 연륜, 술을 마신 친구, 술을 마신 기회, 술을 마신 동기, 술버릇 등에 따라 그 품격이 정해진다고 했다.
우리도 이제는 술을 대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주도의 3가지 철칙은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스스로 절제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술을 마신다(절제:人呑酒).
△내가 마시는 술과 나의 주량을 알고 마신다(지식: 知彼知己).
△분위기에 맞는 술을 선택하여 멋지게 마신다(주법·매너: 風流)
정헌배 중앙대 산업경영대학원장
대부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난생 처음으로 합법적인 술자리를 갖는다.
지난해까지 3월 무렵이면 “모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들의 강권을 못 이겨 과음한 신입생이 결국 숨졌다”는 소식이 종종 신문에 실렸다. 기성세대의 반응은 이중적이다. 대부분 “그 녀석들 정말 정신 없는 녀석들이네”라며 비판한다. 그러나 막상 젊은이들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그들이 술 안 마신다고 빼면 “요즘 젊은 것들은 술도 한 잔 안 하나”라며 강권한다.
한국은 세계 제일의 위스키 수입국. 성인 1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이 소주 160병(2홉들이 기준)에 이른다. ‘거부할 것은 거부할 줄 안다’는 신세대 대학생. 그들은 과연 어떻게 술을 마시고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서울대 동아리 선후배들의 술자리에서 ‘신세대 대학생의 술 문화’를 엿봤다.
●1차 고기집
10일 오후 7시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명 ‘녹두거리’. 이곳은 서울대 학생들이 술 마시기 위해 가장 자주 모이는 골목. 서울대 주식투자 연구 동아리인 ‘서울대 투자연구회’ 소속 대학생 7명이 모였다. 동아리 공부 모임을 마친 뒤 가진 뒤풀이 자리.
“뭐 먹을까요?”라고 묻자 이들은 “오늘은 동아일보 기자님이 사주시는 거니까 고기 먹어야죠”라며 돈 낼 사람을 미리 결정해 버렸다. 허름한 고기집으로 들어갔다. “평소에도 이런 데(고기집)서 술을 마시느냐”라고 묻자 “돈 있으면 이리로 와요” “여기서 마시면 최고죠”라며 즐거운 표정들.
앉자마자 이들은 목살과 삼겹살을 시켰다. “술은 평소 먹던 걸로 시키죠, 뭐. 여기 ‘오십세주’ 주세요.”
쾌활한 성격의 태헌이 소주와 백세주를 큰 유리병에 능숙히 섞은 뒤 모두에게 따랐다. 따르는 순서는 철저히 선배부터.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첫 잔이지만 ‘원샷’을 하는 이는 없었다.
“누가 술 제일 잘 해요?”라고 묻자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여학생(황수영)에게 꽂혔다. “말해, 황수영” “그 이야기를 해 드려”라며 난리.
“옛날에 후배들이랑 술 마실 때요, 제가 후배들한테 술을 전혀 안 권해서 인기를 끌었어요.”(수영)
“왜 안 권했는데요?”(기자)
“남한테 술 주는 게 아까워서요. 내가 먹을 술도 모자라 보여서….”(수영)
와 하는 웃음이 터졌다. 술을 거의 못 하는 최고참 민국에게 수영이 사이다를 따라줬다. 민국은 “너 지금 이러는 것도 나한테 사이다를 많이 마시게 해서 술을 아끼려는 음모지”라고 놀렸다.
술은 항상 ‘윗사람’에게 먼저 따랐다. “늘 그렇게 순서를 지키느냐”고 묻자 “술 안 취했을 때는요” “술 취하면 위아래가 어디 있어?”라고 받았다.
자리가 시작된 지 10분 만에 갑자기 한 여학생(채보연)이 공깃밥을 시킨다. “벌써 밥을 시키나?”라는 기자의 질문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
“원래 밥하고 고기하고 같이 먹는 건데….”
“그럼 밥은 언제 시켜요?”
“고기 다 먹고 나중에 식사 시키는 거 아닌가요?”(기자)
“어른들은 그렇게 먹어요? 신기하다.”
“하긴 밥이 나와도 그거부터 먹으면 배부르니까.”
“원래 고기 먹을 땐 말도 잘 안 하잖아.”
잔을 돌리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어른 흉내내느라 잔을 돌리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게 이들의 설명.
공대 컴퓨터공학부 4학년(00학번)인 종원이 고기를 맛있게 오물거리다가 “역시 동아리는 공대랑 분위기가 달라. 공대에서는 고기 안주에 술 먹는 게 1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뭐 하고 먹어요?”(기자)
“찌개죠 뭐. 소주랑 찌개. 그게 제일 싸거든요.”
같은 공대생인 상우가 거들었다.
“나 신입생 때 환영회 해준다고 선배들이 불렀어. 한 15명이 앉아있는데 테이블에 잔을 쭉 놓고 소주만 따르는 거야. 내가 ‘선배, 안주 하나 먹어요’ 했더니 찌개를 달랑 하나 시키더라. 그것도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안 돼. 숟가락 끝에 국물을 찍어서 먹어야 되는 거야. 우와, 정이 딱 떨어지더라. 내가 돈 내서 찌개 하나 시키고 싶더라.”
“우린 그래도 환영회 때 안주 먹었는데”(보연)
“뭐 먹었는데?”
“기본 안주.”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기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상우는 기자에게 술을 줄 때는 무릎을 꿇고 공손히 따랐다. 소주와 전통주 한 병씩 섞은 오십세주가 두 병째 나왔다.
“상우 형, 술 진짜 잘해.”
“아냐, 나 술 못해. 난 심지어 술 마시는 게 싫어.”(상우)
“주량이 얼마나 돼요?”(기자)
“소주 두 잔이요.”(상우)
“에이, 내가 본 것만 해도 두 병인데.”(종원)
“아냐, 나 진짜 억지로 마시는 거라니까. 나 진짜 화장실 가서 토하고 마시고, 토하고 또 마시고 그러는 거야.”
왜 그렇게 억지로 마시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배들이 안 마시면 싫어해요. 남자가 술도 못 마시느냐고 야단쳐요. 따돌림당하기 싫으니까 마시죠.”
“아직도 그렇게 시비하는 선배들이 있나?”(기자)
종원이 거들었다. “많아요. 공대 선배들은 진짜 술 잘 마셔. 한 번은 ‘원샷 릴레이’(소주를 한 사람이 원샷 하면 옆 사람이 즉시 원샷을 해야 하는 방식)를 하는데 도저히 속도를 못 따라가겠더라.”
“진짜 나쁜 선배들은 ‘우리는 키스(잔에 입만 대는 것), 후배들은 원샷’ 이런 걸 시킨다니까.”(상우)
민국이 “우리 동아리는 원래 소맥(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것)하는 분위긴데”라고 말했다. 동아리 회장인 보연이 “우리가 언제?”라고 묻자 태헌은 “내가 비밀을 털어놓지”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번 맥줏집에서 술 마셨을 때 내가 미리 가 있었잖아. 장난 좀 쳤지. 주방장 아저씨한테 부탁한 거야. 우리가 나중에 ‘맥주 3000cc 주세요’라고 시키면 맥주 2000cc에다 소주 한 병을 섞어 달라고. 내가 나중에 술 시킬 때 ‘아저씨, 맥주 3000cc 주시는데요 아까 제가 말한 2 대 1 말고요, 1 대 1로 주세요’라고 했잖아. 그건 소주하고 맥주를 반씩 타 달라는 거였어.”
“그럼 그때 우리가 마신 게 소맥이었어?”(보연)
“그것도 몰랐냐?”(태헌)
“나야 술맛을 모르니까.”(보연)
신입생인 승환이는 “1 대 1은 좀 심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2시간여. 이들은 “2차 갈까요?”라며 즐거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선약이 있다는 보연이를 빼고 모두 2차로 자리를 옮겼다.
●2차 노래방, 3차 맥줏집
오후 9시반경 근처 노래방에서 2차가 시작됐다. 앉자마자 순서에 따라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를 하지 않는 수영. “수영아, 노래해”라는 친구들의 제안에 수영은 “알코올이 부족해”라며 고개를 저었다. “술을 더 시키자”는 기자의 제안에 한 학생이 “나가서 사오면 된다”며 일어섰다.
“술을 사 올 수 있나요? 주류 반입 금지라고 돼있던데….”(기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야, 가방 좀 비워. 그거 말고 좀 큰 걸로.”
가방에다 술을 몰래 담아오려는 속셈이었다.
기자가 노래를 고른 뒤 음을 맞추기 위해 노래 음정을 두 단계 낮추자 “우∼” 하는 야유가 쏟아졌다.
“요즘은 음정 낮춰 부르면 안돼요” “노래방 매너가 그게 아니죠” “불문율을 모르시네.”
30분쯤 지나 태헌의 여자친구가 노래방을 찾았다. 여자친구는 태헌의 팔짱을 끼고 앉았다.
“반가워요, 누나” “우왕, 누나 예뻐요.”(후배들)
“예뻐? 얘는 아마 그런 소리 처음 들을 걸?”(태헌)
상우와 종원이 이적과 김동률 듀오의 ‘거위의 꿈’을 완벽한 화음으로 재현했다. 알코올이 모자라 노래를 안 하겠다고 버티던 수영도 결국 무대로 나섰다.
예약한 한 시간이 다 되자 최고참 민국이 데스크로 뛰어가 “(시간을) 더 넣어주실 거죠?”라며 종업원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어 30분이 넘는 ‘서비스 시간’을 받아왔다.
오후 11시경 종원이가 “3차 안 가요?”라고 물었다. 여자친구와 먼저 자리를 뜬 태헌과 집에 가야 한다는 상우를 뺀 5명이 근처 맥줏집을 찾았다. 밀러 등 외제 맥주 여섯 병이 들어왔다. 3차가 시작되자마자 이들은 종원에게 “마술을 보여줘, 보여줘”라고 외쳤다. 종원은 가방에서 카드 한 벌을 꺼냈다. 카드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고, 남이 고른 카드를 기막히게 골라내는 현란한 마술쇼가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왜 술을 마시느냐”고 이들에게 물었다.
“우린 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냥 좋잖아요. 다들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취하려고는 잘 안 마시지만 그래도 술자리는 즐거워요.”
누구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고 술을 강권하는 이도 없었다. 술자리는 오전 1시를 넘어서 끝났다.
서울대 동아리 '투자연구회' 소속 참석자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知酒知己(술을 알고 나를 알자)▼
술을 마시는 데에도 도(道)가 있다. 소위 말하는 주도(酒道)가 그것이다. 주도란 술을 바르게 마시는 도리이며 예의범절이다. 혹한기의 추위나 농번기의 힘든 일 등과 같은 고난극복을 위해 마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술은 배부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취흥이 주는 맛과 멋, 그리고 활력 때문에 마시는 것이기에 격식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수준인 소학(小學)에서부터 술을 마시는 예법을 배웠다. 술잔은 어른에게 먼저 올리고 어른이 술잔을 주시면 반드시 두 손으로 받는다. 감히 제자리에 앉은 채로 술을 받을 수 없으며 어른이 이를 만류하면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와 마신다. 그리고 어른이 술잔을 다 비우지 않았으면 젊은이는 감히 마시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어른 앞에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므로 돌아앉거나 상체를 뒤로 돌려 마셨다. 술을 따를 때도 도포의 도련이 음식물에 닿지 않도록 왼손으로 옷을 쥐고 오른손으로 따르는 것이 예법이었다. 이런 예법은 소매가 좁은 양복을 입고 사는 오늘날에도 왼손을 오른팔 아래에 대고 술을 따르는 풍습으로 남아 있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 땅, 조상의 신령에게 제사할 때에는 술을 바쳤지만 도깨비나 마귀에게는 결코 술을 준 일이 없다. 20세가 돼 관례(冠禮)를 한 성인에게만 술을 권했고 미성년자는 절대로 술을 먹지 못하게 했다. 미숙한 상태인 미성년자와 지각이 흐린 정신박약자에게 술을 주는 것은 아주 부도덕한 행위로 규정해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이런 음주 전통이 곧 술을 대단히 고귀한 음식으로 승격시켰다.
또 술은 작게는 개인의 인격을 나타내고 크게는 나라의 정치와 법을 알 수 있는 매개체였다. 조선 후기 사람인 이덕무는 그의 저서 ‘사소절’에서 “훌륭한 사람은 술이 취하면 착한 마음을 드러내고, 조급한 사람은 술이 취하면 사나운 기운을 나타낸다”라고 적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술이 사람을 안다’고도 얘기를 한다. 장인이 사위 될 사람을 불러 대작해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한 쉬운 방법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조상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술 문화의 자취를 잃어버렸다. 가장 큰 문제점은 주량에 관계없이 술을 강제로 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권의 극치가 바로 예외 없이 마셔야 하는 폭탄주다. 이제는 ‘더 빨리 더 쉽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비약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전투적 음주문화’로 특징지어질 우리의 음주문화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이색적인 현상을 파생시키고 있다. 술 깨는 약을 미리 사들고 술을 마시러 가는가 하면 해마다 대학신입생들이 사발주로 아까운 청춘을 잃어버리고 있다. 더욱이 술로 타는 속을 술로 푼다는 비상식적인 해장술 개념이 통용되고 있으며 주사(酒邪)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풍토가 있다.
한국은 주정왕국이다. 술 마시고 저지른 실수나 실언이나 횡포나 가해는 웬만하면 면책된다. 그래서 부도덕한 행위나 비일상적인 횡포나, 반체제적인 언행을 하기 위해 일부러 술을 마시기도 한다. 술 마시고 하는 실수는 사람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술이 저지른 실수다.
스스로 술을 사랑해 주당을 자처했던 조지훈(趙芝薰)은 그의 저서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은 높아지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술을 마신 연륜, 술을 마신 친구, 술을 마신 기회, 술을 마신 동기, 술버릇 등에 따라 그 품격이 정해진다고 했다.
우리도 이제는 술을 대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주도의 3가지 철칙은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스스로 절제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술을 마신다(절제:人呑酒).
△내가 마시는 술과 나의 주량을 알고 마신다(지식: 知彼知己).
△분위기에 맞는 술을 선택하여 멋지게 마신다(주법·매너: 風流)
정헌배 중앙대 산업경영대학원장